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이순신의 함대 재규합,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 > 7월 18일 (정미) 맑음 >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 고 하였다. 듣자하니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 >[[난중일기]] - 정유년(1597) 제대로 된 전투가 없이 조선 수군이 와해가 되었다 보니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으며,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함선도 절반 정도는 살아남았긴 하나, 말 그대로 수군이 와해가 된데다, 건조 중이였던 함선을 모두 태워버리고, 실제로 현장에서 당장 동원이 가능했던 함선이 12척이였을 정도로 상황이 너무 참담했다. 실제로 아래와 같은 기록도 남아있다. >"이 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 >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적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다만 이는 추후 임진왜란에 동원된 함선 수를 감안하면 중복 집계로 인해 전과가 뻥튀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칠천량 해전에서 1년만인 [[절이도 해전]] 때 함선이 85척이다.] 시간상 건조해선 이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쳤던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고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명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그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산도 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증발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감안하면, 이는 큰 타격이며 사기가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아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으므로 매우 중요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 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말한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인 해상 보급 문제가 원균 덕분에 해결되었다. 다만 일본군은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둔 탓에 서해로 곧바로 진출하지 않고 7월 말까지 주변 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일본군은 애초에 이런 식의 대승을 염두에 두지 못하여 서해로 보급 선단을 진출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 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고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영화 명량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했다. 영화 초반에 일본군에게 끝까지 분전하다 참혹하게 잡혀 끌려다니다 사살된 장수와 조선 군영에서 탈영하려다 참수당한 공포에 실성한 병졸이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 밑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한 부장과 병졸이라는 설정이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이 조선 수군에게는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 >《조선일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 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였던 케이넨이 쓴 종군일기. 케이넨은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조선일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하여튼 이순신은 원통함을 뒤로 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728800050&spage=1|#]]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 >《월탄연보》 이렇듯 조선 수군은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황당한 패전으로 궤멸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선 [[명량 해전|말도 안되는 엄청난 기적]]이 필요해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